히틀러: 악의 탄생(Hitler: The Rise of Evil) 영화의 주석

2012. 7. 10. 00:52

인상적으로 본 영화였습니다, 매체에서 다양한 히틀러의 모습을 봤었지만 '젊은 히틀러의 모습'은 처음이었거든요.

▲ 영화라기보다는 다큐?!

이 영상이 정식으로 국내에 유통되었는지는 모르겠으나, 저를 비롯한 많은 분들은 '아마도' 이런 저런 방식으로 구한 영화파일에 smi자막으로 보셨을 겁니다.

 

자막을 보시다보면, 영상 중간 중간에 '주'라고 언급된 부분이 있는데요.

이는 자막을 만든분께서 영상에 대한 배경이야기를 달아놓은 것으로 영상에 대한 이해도를 높여줍니다, 재미도 배가 되구요.

다만, 이 주석파일이 smi파일과 함께 유통되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라...

저도 꽤 뒤적거렸구요.

앞으로 뒤적거리실 분도 많으시리라 생각되어 아쉬운 마음에 제 글은 아니지만 전문을 옮겨왔습니다.

 

자막 및 주석 제작자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CD1]

 

주1 (0:00:30, 0:22:40)

<파르지팔Parsifal>, <로엔그린Lohengrin> 등은 19세기 독일 작곡가 리하르트 바그너Richard Wagner의 오페라이다. 각각 중세 유럽 전설인 <파르치발Parzival>과 <로렌겔Lorengel>을 원작으로 하였다. 히틀러는 바그너의 작품에 정신적으로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주2 (0:01:00)

아돌프 히틀러Adolf Hitler의 모친 클라라 히틀러Klara Hitler는 푈즐Pölzl 가에서 태어났으며, 남편 알로이스 히틀러Alois Hitler는 그의 고모부뻘 되는 가까운 친척이었다. 클라라는 결혼 후에도 남편을 "고모부"라고 불렀다고 한다.

히틀러 가문의 족보는 다음을 참고하라. (2010년 4월 12일 접속)

http://history1900s.about.com/library/holocaust/nhitanc.htm

 

주3 (0:02:20)

이 장면은 역사적 오류이다. 알로이스 히틀러는 집에서가 아니라 그의 단골 술집에서 갑자기 쓰러져 몇 시간 후에 사망했다. 사인은 뇌일혈로 추정된다. 당시 아돌프 히틀러는 13세였다.

 

주4 (0:03:10)

히틀러 가문의 주치의 에두아르트 블로흐Eduard Bloch(이 장면에 나오는 인물)에 따르면, 히틀러는 모친 클라라를 극진히 보살피고 사랑했다고 한다. 히틀러는 클라라를 끝까지 간호해 준 블로흐를 고맙게 생각했으며, 실제로 1935년 오스트리아 합병 당시 유대인이었던 그를 이례적으로 프랑스로 떠날 수 있게 해주었다.

 

주5 (0:03:50)

아돌프 히틀러의 모친 클라라는 알로이스 히틀러의 셋째 부인이었다. 안젤라 히틀러Angela Hitler는 알로이스와 그의 둘째 부인 프란치스카 마츨베르거Franziska Matzelberger 사이에서 태어난 아돌프의 이복 누나이다. 안젤라가 겨우 1세 때 프란치스카가 사망하였기 때문에, 그는 아돌프 히틀러의 생모 클라라 밑에서 자랐다.

 

주6 (0:05:00)

히틀러는 빈Wien에서 미대에 두 번 지원했지만 모두 입학을 거절당했다. 교수에게 건축가가 되라는 조언을 받았지만, 높은 학력 요건을 충족시키지 못하여 그마저 할 수 없었다.

 

주7 (0:06:35)

히틀러가 유대인이거나 유대인 조상을 두었다는 낭설이 있으나, 전문가들에 따르면 이는 근거 없는 주장이다.

 

주8 (0:07:00)

빈에서 돈이 떨어진 히틀러는 노숙자를 위한 복지시설에 살며, 매우 힘들게 생계를 이어갔다. 그는 몇 년 동안 엽서에 담긴 그림들을 그대로 그려 파는 그림장이 신세였다고 한다.

 

주9 (0:08:55)

이 장면의 자막은 역사적 오류이다. 히틀러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을 떠나 독일 뮌헨München으로 간 것은 1914년이 아니라 1913년 5월이었다. 한글 자막에는 고쳐셔 표기했다.

 

주10 (0:11:00)

히틀러의 제대시 계급 'Gefreiter'를 '하사관' 등으로 잘못 옮기는 경우가 많으나, 영문 'corporal'을 거쳐 중역되면서 빚어진 실수로 보인다. 실제로 이는 상병에 해당하는 병사 계급이다.

 

주11 (0:12:40)

이 장면은 역사적 오류로 여겨진다. 히틀러는 동물 애호가였으며, 그가 동물을 때린 기록은 없다. 실제로 나치는 동물보호를 위해 여러 정책을 고안했는데, 1933년에 세계 최초로 제정된 동물보호법이 한 예이다.

 

주12 (0:15:25)

이 장면은 장교가 유대인임을 암시한다. 그의 반지에 새겨진 문양은 '다윗의 별'로 유대인의 상징이다.

 

주13 (0:16:10)

이 장면은 역사적 오류로 여겨진다. 히틀러는 여기에 묘사된 것처럼 정치적인 이유에서가 아니라 전선에서의 용맹함을 인정 받아 철십자Eiserne Kreuz 훈장을 받았다. 그는 제1차 세계대전 중에 두 개의 훈장을 받았는데, 이는 사병으로서 흔치 않은 일이었다.

 

주14 (0:17:35)

히틀러는 이페리트라는 독가스 공격으로 일시적으로 실명되어 치료를 받았다. 패전의 충격으로 인한 히스테리성 실명이라는 설도 있다.

 

주15 (0:19:20)

이 장면은 역사적 오류이다. 뮌헨에는 빌헬름 2세Wilhelm II 황제의 동상이 없었다. 당시 독일에서 살아 있는 인물의 모습을 딴 상을 세우는 것은 부적절한 것으로 여겨졌다. 또한 프로이센Preußen 국왕인 그의 동상이 바이에른Bayern의 수도 뮌헨에 세워져 있는 설정은, 양자 간의 오랜 긴장관계를 생각할 때 받아들이기 어렵다.

 

주16 (0:20:05)

자유군단Kreikorps은 제1차 세계대전 뒤에 제대 군인과 우익 장교들이 조직한 민병대로, 주로 좌익 세력과 시가전을 벌였다. 자유군단의 에른스트 룀Ernst Röhm과 그의 부하들은 훗날 나치 돌격대Sturmabteilung(SA)에 편입되었다.

 

주17 (0:21:55)

이 장면은 역사적 오류로 여겨진다. 히틀러가 음주를 자제하기 시작한 것은 1925년 란츠베르크 감옥에서 나온 이후이다. 또한 그 뒤에도 종종 맥주와 와인을 마셨다.

 

주18 (0:29:10)

에른스트 한프슈탱글Ernst Hanfstaengl은 독일인 사업가였다. 젊은 시절 미국에 건너 가 아버지의 출판사업을 물려받고, 아내 헬레네Helene를 만나 결혼했다. 1922년에 독일로 돌아와 히틀러의 심복이 되었고, 실각한 후에는 미국에 가 루즈벨트 아래서 일했다.

 

주19 (0:36:00)

'나치Nazi'라는 말은 독일어 'Nationalsozialistische Deutsche Arbeiterpartei(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의 첫 두 음절에서 딴 것이다. 주로 당 외부에서 모욕 삼아 부르는 말이었으며, 히틀러가 수상이 된 1933년 이후 독일 내에서는 잘 쓰이지 않았다.

 

주20 (0:39:00)

에른스트 한프슈탱글은 미국에 있을 때 피아노를 배웠는데, 후에 히틀러가 그의 연주를 즐겨 들었다고 한다.

 

주21 (0:40:20)

이 장면에서 포스터에 그려진 것은 러시아 혁명을 주도한 블라디미르 레닌Владимир Ленин의 얼굴이다. 그는 소비에트 연방의 초대 수령으로, 당시 공산주의자들의 우상이었다.

주22 (0:46:20)

하켄크로이츠Hakenkreuz 또는 스바스티카Swastika라 불리는 갈고리 십자가 무늬는 나치의 상징이었다. 이는 본래 고대 게르만족의 상징으로, 아리아 인종의 고유성과 우월성을 주창하는 히틀러의 반유대 민족주의와 부합하였다. 배경의 적색은 붉은 피를 나타내며, 혈통의 순수성을 의미했다.

주23 (0:52:35)

나치식 거수경례는 본래 고대 로마에서 개선 장군에게 하던 것이었다. 이탈리아 파시스트당의 독재자 베니토 무솔리니Benito Mussolini와 히틀러가 이를 따라 했다고 한다.

 

주24 (0:53:30)

이 장면의 대사는 역사적 오류이다. 구스타프 폰 카르Gustav von Kahr는 1921년에 바이에른 수상직을 사임했고, 당시 수상은 오이겐 폰 크닐링Eugen von Knilling이었다. 크닐링이 1923년 9월에 정치적 불안정을 이유로 계엄령을 선포하고 카르를 주감독관Staatskomissar에 임명함으로써, 그는 독재 권력을 쥐게 되었다.

 

주25 (0:59:20)

주감독관에 오른 구스타프 폰 카르는 바이에른 국방군Reichswehr 사령관 오토 폰 로소브Otto von Lossow 장군, 경찰국장 한스 폰 자이서Hans von Seisser 대령과 함께 삼두정치를 하였다.

 

주26 (1:06:50)

이 장면 앞뒤에 나오는 사건을 영어로는 뮌헨 폭동Munich Putsch 혹은 맥주장 폭동Beer Hall Putsch, 독일어로는 히틀러 폭동Hitlerputsch이라고 한다. 사건의 진행 과정은 영화에 자세히 묘사되었다.

 

주27 (1:21:25)

히틀러는 오스트리아 (정확히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국적을 가지고 태어났다. 그렇지만 그는 역사적으로 독일과 오스트리아가 단일 국가라고 생각했고, 자신을 독일인으로 여겼다. 그가 정식으로 독일에 귀화한 것은 1932년의 일이다.

 

주28 (1:22:00)

제1차 세계대전 이후 독일 군부와 민족주의 우익 세력은 패전의 책임을 다른 이들에게 돌렸다. 그들은 독일이 전쟁에서 이기고 있었으나, 유대인과 공산주의자 들의 후방 교란으로 패배했다고 주장했다. 배후단도설Dolchstoßlegende이라 불리는 이러한 거짓 선전은 히틀러가 나치 정권을 정당화하는 데 이용됐다.

 

 

 

[CD2]

 

주29 (0:09:20, 0:26:45, 0:56:20)

이 장면들에는 다소 허구와 추측이 가미된 것으로 보인다. 히틀러의 연애 생활에 관한 소문이 무성하나 명확히 알려진 바는 없다. 그는 정치적 사명에 몸을 바치고 가정을 포기한 삶을 사는 것으로 자신의 이미지를 포장했다.

히틀러는 1920년대에 미미 라이터Mimi Reiter와 약혼한 적이 있으며, 조카뻘인 겔리 라우발Geli Raubal과 매우 가까이 지냈고, 훗날 에바 브라운Eva Braun과 결혼했다. 겔리와의 관계가 성적인 것이었거나, 그것이 그의 자살과 연관됐다는 증거는 없다. 1945년에 제2차 세계대전의 패전을 앞두고 에바 브라운과 히틀러는 지하 벙커에서 혼인하였으며 이튿날 동반 자살하였다.

위의 세 여인이 모두 자살을 기도했고, 라이터를 빼고는 성공했다. 그 때문에 일각에서는 히틀러가 변태성욕자라고 주장하지만, 라이터는 이를 부인했다. 이 영화에서 히틀러와 성적 관계를 맺거나, 그가 흠모하는 대상으로 묘사되는 인물은 헬레네 한프슈탱글, 겔리 라우발, 에바 브라운 등이다.

 

주30 (0:20:50)

이 장면은 역사적 오류로 여겨진다. 실제로 에리히 루덴도르프Erich Ludendorff는 이 영화에 묘사된 것처럼 무능한 인물이 아니었다. 1935년에 히틀러가 루덴도르프를 방문하여 원수를 제안하였을 때, 그는 격노하며 거절하였다고 한다.

그 밖에도 히틀러의 집권 과정에서 각 인물이 기여한 정도가, 이 영화에서 실제와 다르게 나타났다는 비판이 있다. 헤르만 괴링Hermann Göring, 조제프 괴벨스Joseph Goebbels, 그레고르 슈트라서Gregor Strasser 등의 역할이 지나치게 작게 그려졌다. 하인리히 힘러Heinrich Himmler와 디트리히 에카르트Dietrich Eckart는 아예 등장하지 않는다.

 

주31 (0:22:40)

이 영화에는 자세히 묘사되지 않지만, 나치의 당내 군사조직에는 돌격대 외에도 친위대Schutzstaffel(SS)가 있었다. 당이 커짐에 따라 돌격대는 점차 친위대에 권력을 빼앗기는데, 그것의 분수령이 된 '장검의 밤 사건'이 뒤에 나온다.

 

주32 (0:24:05, 0:41:20)

'승리 만세'를 뜻하는 '지크 하일Sieg Heil'는 '하일 히틀러Heil Hitler'와 함께 나치당의 대표적인 구호였다.

 

주33 (0:38:15)

겔리 라우발의 죽음을 둘러싸고 숱한 주장이 있다. 크게 자살설과 히틀러가 살해했다는 설로 나뉜다. 자살 혹은 타살의 이유로는 다른 남성과의 교제, 성악 공부를 계속하러 빈에 돌아가고자 했는데 히틀러의 거기에 반대했다는 것 등이 거론된다.

 

주34 (0:40:20)

아돌프 히틀러의 부친 알로이스 히틀러의 본래 성은 쉬클크루버Schicklgruber였다. 이것은 미혼모였던 그의 모친 마리아 쉬클크루버Maria Schicklgruber에게서 딴 것이다.

마리아는 알로이스가 5세 때 요한 게오르그 히들러Johann Georg Hiedler와 혼인했고, 알로이스는 훗날 히틀러Hitler로 성을 고쳤다. 그가 왜 '히들러'가 아닌 '히틀러'로 개성했는지는 분명하지 않으며, 서기의 실수로 빚어진 일이라는 설이 있다.

 

주35 (0:57:50)

프란츠 폰 파펜Franz von Papen을 실각시키고, 수상이 된 쿠르트 폰 슐라이허Kurt von Schleicher 히틀러의 세력을 약화시키려고 하였다. 이 사실을 안 히틀러는 파펜을 찾아 가 도움을 호소했습니다. 파펜과 히틀러의 비밀회동 결과, 히틀러를 수상에, 파펜을 부수상에 임명하는 연립내각 수립이 합의됐다.

 

주36 (1:00:30)

에바 브라운은 히틀러와의 연애 초기에 두 차례 자살을 기도했다. 1932년 11월 1일에는 가슴을 총으로 쐈고, 1935년 5월 28일에는 수면제를 과다 복용했다. 이 영화에 묘사된 것은 전자이다.

 

주37 (1:07:50)

의사당 화재 사건Der Reichstagsbrand은 나치 독재 정치 확립의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히틀러가 비상대권을 장악하기 위해 꾸민 자작극이라는 설과, 단지 사건을 이용했을 뿐이라는 설이 있다.

 

주38 (1:09:40)

전권위임법 혹은 수권법Ermächtigungsgesetz은 비상사태에 입법부가 행정부에 입법권을 위임하는 법률을 말한다. 일반적으로, 1933년의 독일에서 나치 독일 정권에 입법권을 위임한 법률을 가리킨다. 정식 명칭은 민족 및 국가의 위난을 제거하기 위한 법률Gesetz zur Behebung der Not von Volk und Reich이다.

 

주39 (1:12:30)

이 장면에서 불리는 노래는 독일 국가 <도이칠란트인의 노래>의 1절 부분이다. 가사가 제국주의를 암시한다는 이유로 1, 2절은 현재 금지되고 3절만 불린다. 1절 가사를 옮긴다.

 

독이칠란트, 최강의 독이칠란트

세계 최강의 독이칠란트

조국이 형제 되어 굳게 뭉치면

공세에서 수세에서 굳게 뭉치면

마스 강에서 메멜 강까지

에치 강에서 벨트 해협까지

-후렴구로 1, 2행 두 번 반복

 

주40 (1:17:40)

이 장면에 묘사된 것을 장검의 밤 사건Nacht der langen Messer이라 한다. 이는 히틀러가 하인리히 힘러의 친위대를 동원하여, 바드비제의 한 휴양지에 있던 돌격대 참모장 에른스트 룀과 돌격대 내 반대 세력을 숙청한 사건이다.

 

주41 (1:18:10)

에른스트 룀은 자신의 부관인 에드문트 하이네스Edmund Heines 등 돌격대 부하 장교들과 동성애를 했다고 한다. 돌격대의 숙청 이유는 대중에 바로 발표되지 않았다. 그저 비행이나 변태행위의 혐의로 처단됐다는 암시가 있었을 뿐이다. 며칠 후 룀과 돌격대 지도부가 연루된 돌격대 "반역행위"가 공개됐다.

 

주42 (1:23:30)

히틀러는 오랜 동지인 룀을 처형하는 것을 주저했다. 실제로 룀은 헤르만 괴링, 조제프 괴벨스와 더불어 당내에서 히틀러에게 '총통' 대신에 '아돌프'라는 호칭을 쓰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히틀러는 친위대를 시켜 룀에게 자살할 기회를 줬지만,룀이 이를 거절하였고 결국 그는 감옥에서 사살됐다.

 

주43 (1:26:30)

뉘른베르크 법Nürnberger Gesetze은 히틀러가 고안하고 1935년 뉘른베르크 전당대회Reichsparteitag에서 승인된 두 법안을 가리킨다. 이는 유대인의 독일 시민권을 박탈하고 그들을 '국가의 종속물'로 명명했으며, 유대인과 독일 국민 또는 독일계 혈통 간의 결혼과 성 관계를 금지했다.

 

주44 (1:26:40)

수정의 밤 사건Die Kristallnacht은 1938년에 나치가 유대인을 대상으로 벌인 폭력 사건을 말한다. 그날 밤의 난동으로 유대인 91명이 죽고 수백 명이 중상을 입었으며 수천 명이 수모를 당했다. 수천 개의 유대인 상점이 약탈당하고, 약 177채의 유대교 회당이 파괴됐다.

 

주45 (1:27:20)

1942년에 히틀러의 명령으로 유대인 문제Judenfrage의 '최종적인 해결Endlösung'을 위한 회의가 열렸다. 여기에 모인 나치 고위 관료들은 모든 유대인을 모아 동부로 이송하여 수용소에 가두기로 하였다.

구체적으로 이 계획은 노동과 생활 조건을 열악하게 만들어 많은 사람을 '자연감소' 시키고, 살아남은 유대인들은 '상황에 따라 처리'하는 것이었다. 이것의 실행은 하인리히 힘러와 그의 친위대 및 게슈타포가 맡았다.

 


- 출처 : 미상
토닥이랑의 모든 게시물은 직접 촬영하고, 글로 담은 自作 컨텐츠로 퍼가는 행위(펌)를 일절 허락하지 않습니다.
인용한 내용은 출처를 별도 표기하고 있으며, 미비한 경우 댓글로 알려주시면 신속하게 조치하겠습니다.
(떠도는 이야기, 뉴스스크랩 등 일부 카테고리는 게시물 성격에 따라 생략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