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ake &/a rest

페리카나 치킨

todaki 2010. 9. 12. 00:52

90년대 초반, 양념치킨이라는 전혀 새로운 장르로 최양락의 요술공주 샐리 노래를 내세워
초딩들의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페리카나 치킨!
당시 TV에서 독수리5형제 관람 후 양락아저씨의 CM송이 고정적으로 나왔는데
나는 이 광고만 보면 군침을 튀기며 '엄마 통닭 사줘'를 외치곤 했다.
(이걸 유식한 말로 '조건반사'라고 한다)

독수리 5형제 관람 중 마음깊이 각인된 5명의 새대가리와 광고에 나오는 맛깔스럽게 튀겨진
치킨을 보며 나는 미각과 식욕본능의 노예가 되버리고 말았다.
나중에는 조건반사가 지나쳐 독수리5형제의 독수리머리 함선만 봐도 바로 페리카나 치킨이
생각나버렸고 5형제중 대장인 흰 독수리녀석의 헬멧이 닭처럼 보이기 시작했다..
누가 광고를 만들고 그 시간대에 편성했는지..
정말 그는 광고의 귀재다.
(이거는 유식한 말로 '시너지효과'라고 한다)

당시 우리 어머니는 보험설계사를 하고 계셨다. 주위에서 여장부, 사업가라는 평을 듣던 분 답게
상당히 많은 성과를 냈지만, 집에는 늦게 들어오시기 일쑤였다.
늦게 들어오시는 날이면 '페리카나 가서 먹고와 돈은 보험료로 대신한다고 하고' 하셨다.
우리집 반경 500미터에 있는 가게의 대부분은 어머니의 고객이었는데 페리카나라고 울어머니의
마수에서 벗어날수는 없었던 것이다.

어쨌든 그렇게 이웃사촌 처럼 편하게 들락거린 페리카나 치킨을.. 내게 성스러운 2차성징이
오면서부터 팽~ 하기 시작했다.
가슴 큰 여자 사진이 붙어있고 어둑한 동네 닭집 보다는 왠지 있어보이고 스스로 초등학생의
트렌드 리더처럼 느껴지게 만드는 밝고 화사한 이미지의 압구정 롯데리아나 KFC를 찾기 시작한
것이다.

그 뒤로 내 마음의 1순위는 KFC가 되었고, 특히 짭짤한 KFC 오리지날 치킨만 고집할 정도로 나름
주관이 있던 미각 탓에 다른 치킨으로는 쉽사리 마음을 주기 힘들었다.
그런 고로... 내가 이제와서 페리카나 치킨을 찾는 이유는 얼마전 반짝 유행이었던
'추억의 불량식품'과 같은 단기적 향수 증상일 수도 있겠다.

어쨌든... 요즘들어 자꾸 페리카나 양념치킨이 너무너무너무 먹고 싶었다.
동시에 맥주한잔 할까 싶어 회사 근처에 페리카나가 있는지 네이버에서 검색..
페리카나 홈페이지로 접속했다.
구질구질한 동네 닭집 이미지와는 달리 상당히 깔끔한 홈페이지에 잠시 주춤했다.
('안망했네?' 였다)

그런데 강남역 반경 1km내에는 페리카나가 한군데도 없는게 아닌가! 치킨의 최강자로 한때는
페리카나가 있나, 없나로 동네 집값까지 쥐락펴락 했던 그 페리카나가(물론 구라) 이젠 시대의
주류에서 벗어난것이다..
아.. 세월의 무상함이여...

게다가 주위 친구들은 같이 먹자는 제안에 이제 대세는 둘둘치킨이라는 이유로, 문화의 거리
강남역이나 압구정에 없다는 이유 등등으로 거절했다. 그래서 결국 혼자서라도 기필코 먹고야
말겠다고 다짐했다.

퇴근 후 나는 종종걸음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조금이라도 빨리 먹고 싶은 마음에 114에 HELP를
때리고 페리카나에 미리 전화를 했다.
'저 20분 뒤에 도착하니까요.. 양념 한마리만 시간맞춰 튀겨주세요!'
배달을 시키면 만약에 주문이 밀릴경우 이집 저집 돌다가 짜장면 불어터지듯 눅눅한 치킨을
먹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젠 인기도 없는 치킨이지만.. 뭐 눈엔 뭐만 보인다고..
왠지 아까는 아파트 단지 전체가 페리카나만 먹을것만 같은 불안감이 엄습해왔던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나의 미각엔 나름 주관이 있다.

헐레벌떡 들어간 페리카나... 나를 반긴것은 접시위에 수북히 쌓여있는 양념치킨이었다.
'드시고 갈거 아니었어요? 그럼 배달을 시키지 왜 튀겨놓으래?'
오... 지쟈스... 다급한 마음에 6하원칙에 의거한 상세한 설명을 놓치고 말았던 것이다.

일단 접시를 만져봤다. 아직 치킨의 뜨거운 열기가 접시 끝자락에 전도되지 않은것을 보니
후라이드가 양념으로 재탄생 되어 세상에 공개된지는 긴 시간이 지나지 않은듯 했다.
천만 다행이었다. 아무리 좋은 음식이라도 공기중에 산화된 시간이 길면 맛이 변질되기 때문이었다.
'얼른 싸주세요'
한마디를 외치고 부랴부랴 포장하는 아줌마의 손놀림을 초조하게 바라보았다.
공기를 빼내어 치킨무를 포장하는 섬세한 손길에서 장인의 혼을 느낄수 있었다.

다시 종종걸음으로 집으로 가는 길...
불과 100미터밖에 안되는 거리이지만 나는 무척이나 간절했다.
이미 내 치킨은 차가운 접시에 일격을 맞은 상태였기 때문이다.
'식으면 안돼... 식으면 안돼... 식지마 이자식아...'
그녀를 만나는곳 100미터 전에서 묻어나오는 이상우의 심정을 이해할 듯 하고, 전쟁영화에서
총탄맞은 형제를 부둥켜 안고 죽지말라고 목놓아 우는 장면의 주인공이 된 것 같았다.

엘리베이터 앞에서..
아래층 여대생이 먼저 대기하고 있었다. 천운이었다. 조급한 나를 위해 엘리베이터를 미리
1층으로 끌어주는 천사같았다.
내가 엘리베이터 앞에 당도함과 동시에 문이 열렸다. 하늘이 나를 돕고 있다는 증거다.
그 광경은 흡사 모세의 기적과 같았다.
엘리베이터 가득 퍼지는 페리카나 양념치킨 냄새에 그녀는 적잖이 당황한듯 했다.
체면 때문에 킁킁대는 소릴 내지는 않았지만, 심호흡으로 인한 어깨의 상하운동마저 숨기지는
못한것이다.
훗, 오늘밤 또 한명의 소녀를 후각의 황홀경으로 몰아 넣었군 그래..

집에 도착하여 "너 살찐다고 그런거 먹지 말랬잖아!"라는 어머니의 1차 호통러쉬를 막고
손을 씻고 방안에 작은 상을 놓고 콜라와 치킨무를 뜯었다.
치킨을 먹기까지의 준비과정이 이토록 길게 느껴진 적이 없었다.

펠리컨 캐릭터가 새겨진 포장지가 눈에 띄었다.
보아하니 아직도 초등학생을 대상으로 마케팅을 하는듯 한데..
가게엔 왜 아직도 가슴 큰 여자가 걸려있는겨?

따위의 생각을 하며 조심스럽게 겉옷을 벗겼다.
가지런히 놓인,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주황빛 내용물을 향해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말했다.
'다 먹어 줄테다'
겁먹은듯 치킨을 감싸고 있던 은박지가 순간 파르르 떨림을 보았다.
조심스럽게 다리를 만졌다.

음... 그래, 이 촉감이다. 나를 유혹했던 이 따땃하고 끈적하고 질퍽한 양념소스의 느낌.
이놈 때문에 엄마가 월급을 못모으고 오랫동안 우리집이 전세 살았구나!
옳커니! 하고 무릎을 탁 쳤다.

나는 허벅지부터 공략해 들어갔다. 앞니와 송곳니가 먼저 허벅지살을 뜯어냈다.
내 치아의 초당 약 3회의 상하 운동에 허벅지살은 점차 어금니쪽으로 이동해갔다.
아니... 이 풍부한 질감은...?

양념소스는 앞니가 물어 뜯을 때 이미 미각세포 공격을 위해 대부분 혀쪽으로 이동되었고
어금니로 도착할때 쯤엔 하얀 속살만이 남아있었던 것이다. 혀는 소스의 맛을 즐기고 있었고,
동시에 어금니는 씹는 맛을 즐기는... 환상의 하모니였다.
테란의 마린메딕보다, 프로토스의 질럿템플러보다, 저그의 저글링뮤탈보다 더욱 완벽한
조합이었던 것이다.

내 마음의 1순위는 온데간데 없어지고 나는 정신적 아노미 상태에 빠져들었다.
사고의 프로세스를 관리하고 운영해주던 무의식적인 질서들이 하나씩 붕괴되어 간 것이다.
KFC의 두텁고 흐물한 튀김옷과 달리, 페리카나 양념치킨은 액체 양념이 깊이 베어있음에도
불구하고, 껍질의 얇고 탄탄한 조직을 유지시키는 페리카나만의 전통적인 제조기법 노하우에
의하여 바삭한 질감을 그대로 느낄 수가 있었다.

뿐만 아니라, 느끼한 닭 껍질의 특성에 더하여 기름에 튀겨내기 까지 한다면 과도하게 느끼하기
쉬운데, 소금으로 짭짤함을 가미하여 느끼함의 난폭질주를 좌회전 신호 받고 유턴시켰던
KFC할아버지의 눈가리고 아웅식 해법과 달리, 페리카나 양념치킨은 느끼할것처럼 보이나
느끼하지 않은 특유의 달큰시큼한 소스와 얇은 튀김옷으로 바삭함은 이루되 튀김옷에 배어있는
기름의 양 자체를 줄여 근본적인 해결책을 제시한 것이다.

KFC 할아버지의 해법이 한 수 아래라고 평가하는 이유는 유턴시켜봤자 질주 자체를 막는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짭짤함은 느끼함을 덜느끼도록 착각토록 할지는 몰라도 그로인한 또 다른 맛의
손실을 가져올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괜히 페리카나가 원조가 된 것이 아니고 괜히 양념치킨의 레전드로 불린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나는 미친듯이 먹어댔다. 눈이 뒤집어져 흰자위만 보이도록 먹어댔다.
페리카나 치킨이 내 안에 걸신을 소환한 것이다!
대단한 페리카나... 귀신까지 불러들일 정도의 맛이라니...
정신을 차리고 보니 왼쪽 입가에 길게 뻗어있는 양념 소스 한줄기와 초토화된 닭 상자만이
무아지경 상태에 놓인 나의 행동을 대변해주고 있었다.

한마리를 혼자 해치우고 부엌에 내놓으려 나가는 순간 동생이 왔다.
제길... 조금만 빨리왔으면 걸신에 들린 날 구제해줬을텐데...
이제 동생이 매일 사오던 서브웨이 샌드위치에는 눈길조차 가지 않았다.
이것이 바로 가진자의 여유이며 풍족한 뱃속의 당당함이렸다.

내가 이런 글을 쓰는 이유는 옆집이 페리카나 장사를 해서도 아니고 페리카나 빠돌이이기 때문도
아니며, 페리카나 주식을 샀기 때문은 더더욱 아니다.
얼마전 강남역 교촌치킨에서 조류독감에 걸리면 보상금이 몇억이라는 말에 '반숙으로 튀겨주세요'
라고 했던 불순한 의도와는 달리, 처음부터 끝까지 순수하게 본능에 충실한 행보를 거쳤기
때문이며...
페리카나를 먹기위한 과정부터 미션 클리어까지 워낙 드라마틱하고 파란만장했기 때문에
남은 삶에 언제 또 이런 경험을 하겠나 싶어 기술해둔 것이다.

그럼 모두 즐닭~

- JohnBir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