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충사에 다녀왔습니다.

2017.04.10 01:52

따뜻한 3월 어느날.

충무공 이순신의 호국정신을 떠올리며 현충사에 다녀 왔습니다...는 아니고, 어쩌다 무료개방이라서 들리게 되었습니다.

현재 문화재청에서 운영하고 있으며 2012년도부터 무료개방이 되었다고 합니다.

▲ 매표소였겠지만..

▲ 기념관 입구

입구를 지나 조금 걷다보면 이순신 기념관이 나옵니다.

기념관 안에는 이순신 일대기를 그림으로 옮겨놨는데요.(그림말고도 조금 더 있습니다만 볼만한건 그림정도.)

 

같이 감상해보시죠.

▲ 소년시절(전쟁놀이)

 

충무공은 어려서부터 전쟁놀이를 좋아했다. 마을 아이들과 어울려 놀 때면 언제나 대장이 되어 손위 아이들까지도 잘 이끌어 나가는 역량을 보였다. 공은 일찍부터 호걸스럽고 불의에 굽하지 않는 천성을 가지고 있었다.

 

민란이라도 일어난듯한 그림 아래에 적혀있던 코멘트입니다.(화살, 죽창, 깃발...저렇게 놀면 한 둘은 죽어 나갈듯) 묘사가 북한의 수령님 일대기마냥 요즘 보기에는 꽤 올드한 느낌이기는하지만...

원래 호국, 안보, 성웅 이런 주제는 올드한 맛이 있어야겠죠.

 

▲ 첫 무과시험에서 낙마(청년시절)

 

충무공은 나이28세 때 처음으로 무사선발 시험에서 말을 달리다가 말이  갑자기 거꾸러진 탓으로 고으이 왼쪽 다리뼈가 부러졌다. 그러나 공은 한발로 일어서서 곁에있는 버드나무 가지의 껍질을 벗겨 부상한 다리를 처맨 다음 다시 말을 달려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그 기지와 용기를 감탄케하였다.

 

충무공의 주인공적 면모가 드러나는 그림으로 모든 관객이 충무공만 바라보고 있습니다.

▲ 거의 이런 느낌

 

▲ 여진족을 무찌름(함경도에서 초급 무관 시절)

 

녹둔도의 본 이름은 '사슴섬'으로서 두만강이 바다로 들어가는 목에 있는 섬이다. 충무공이 녹눋ㄴ도 둔전관으로 있던 어느날 오랑캐들이 큰 떼를 지어 쳐들어 왔다. 공은 겨우 10여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이리떼 같은 오랑캐들을 물리쳤으며, 놈들의 뒤를 쫒아 포로가 되었던 우리동포 60여명을 구출해 내었다. 

 

말을 탄 충무공보다 포졸복장의 아저씨가 무쌍난무할듯 더 강해보이는건 기분탓입니다.

▲ 다 때려잡을 포스

 

▲ 거북선 건조(전라좌수사 시절)

 

충무공은 전라좌수사가 되어 여수로 내려간 직후, 즉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1년 전부터 거북선을 구상하여 그 제작에 착수했다. '난중일기'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적혀있다. '4월 12일, 식후에 배를 타고 거북선에서 지자(地字), 현자(玄字)를 쏘아 보았다." 4월 13일에 왜군이 부산진을 습격하였을 때는 이미 공의 전쟁 준비는 완료되어 있었다.

 

지자와 현자에 대핸 해석이 조금 있었으면 좋았을것을...

'쏘아 보았다.'라는 말에서 아시겠지만 지자, 현자 모두 화포 이름 입니다.

▲ 영상은 승자총통이지만... 대충 이렇게 생긴 포라는 의미로 옮깁니다.

 

▲ 부산해전 (연전연승)

 

"부산은 적의 근거지가 되어 있다. 그러므로 그들의 소굴을 없애버려야만 적의 간담을 꺾을 수 있다." 이것은 충무공의 주장이었다. 1952년 7월에 거든 한산대첩에 이어 9월 1일 새벽에 충무공은 전 함대 166척을 이끌고 부산 앞바다에 몰려 있는 470여척의 왜선 중 100여척을 격파하였다.

 

파도를 정말 잘그렸습니다. 철썩철썩.

이런 파도에도 우리 거북선은 흔들림없이 적진을...

음...거북선이 아니네요.

 

▲ 한산도 생활(삼도총제사 시절)

 

한산섬 달밝은 밤에 수루에 혼자 앉아

큰 칼 옆에 차고 깊은 시름 하는 차에

어디서 일성 호가는 남의 애를 끌나니

이 '한산섬 시조'는 문무를 겸비한 공의 가장 널리 알려진 문학 작품이다.

 

그림 그리는 분이 묘하게 충무공 안티인지...

충무공 외 다른 부분들을 너무 열심히 그립니다.

저는 달에 먼저 시선이 가더군요.

▲ 이것만으로도 한폭의 그림

 

▲ 충무공의 효성

 

충무공은 전쟁 중에서도 어느 날이나 홀로 계시는 어머님을 잊지 못했다.

난중에 공이 어머님을 찾아 겨우 하룻밤을 지내고 이튿날 아침에 하직을 아뢰었을 때 어머님은 "잘가거라, 어서 가서 나라의 욕됨을 갚아라."하고, 조금도 슬픈 빛을 띠지 않았으니, 과연 그 어머니에 그 아들이었다. 

 

감동적인 이야기입니다만...

문 안을 자세히보면 어머님만 식사중.

하룻밤을 같이 지내고 이튿날 아침에 싸우러 나가는 아들에게 밥도 좀 주시지...

▲ 밥그릇을 단호하게 잡고 있는 어머님과 물끄럼히 바라보는 이순신

 

▲ 죄인의 몸

 

1597년 2월 26일, 억울한 죄수의 누명을 쓰고 서울로 잡혀가는 통제사 이순신 장군! 왜적으로부터 나라와 겨레를 구하고도 왲거의 간계와 조정이 어지러움에 몰려 죄없는 죄수가 된 공은 옥에 갇힌 지 28일 만에 백의종군의 명을 받고 계급 없는 군졸로서 다시 싸움터로 나가게 되었다.

 

앞쪽에 있는 시민들은 나라를 잃은듯 슬퍼하는데...

뒤족에 있는 시민들은 그냥 구경하고 있습니다.

묘한 대조;;

 

 

▲ 명량해전(통제사 재임명)

 

'울돌목'이라고 부르는 명량이란 곳은, 전남 해남군의 서쪽 우수영과 진도 사이에 있는 좁은 해협이다. 1597년 9월 16일 '충무공은 울돌목의 좁은 지형과 물살이 거센 밀물 썰물을 이용한 인지전술과 피난 시키는 민간 선박을 우리의 전선처럼 꾸미고 소수의 군사를 시켜 산허리를 돌게 하여 많은 병력이 있는 것처럼 한 의병전술을 써서, 불과 13척의 배를 가지고 130여척이나 되는 왜선을 섬멸하였다. 

 

거북선은?!

 

▲ 노량해전(충무공의 최후)

 

1598년 11월 19일 새벽, 노량 대해전은 벌어졌다. 공의 독전하는 북소리는 도망가는 왜적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다. 오! 슬프다. 적의 유탄이 공의 왼편 겨드랑을 관통하고 말았다. ":방패로 내 앞을 가려라. 적이 내 죽는 것을 못 보게 해라." "지금 싸움이 한창 급하니,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말라."이 두마리를 남기고 우리의 성웅 이순신 장군은 향년 54세로 장렬한 최후를 마쳤다.

 

이순신의 육신은 떠났지만...

그의 정신은 부하들에게 이어져 노량해전을 승리로 이끕니다.

물론, '그'도 장군님의 마지막 전쟁을 함께 했습니다.

▲ 창도 잘쓰고, 활도 잘쏘고..

 

이순신 일대기는 여기까지.

 

이순신 기념관 말고도 넓은 장소에 다양한 볼거리가 있습니다.

몇개만 소개해드리자면,

▲ 현충사 구본전

충무공의 영전을 모시던 사당이 부서진 관계(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로 당시 디자인을 복원한 '리마스터'사당입니다.

잘 만들었는데...

안에 방이 텅 비어서 좀 아쉬웠습니다.

 

▲ 활을 쏘자!

활쏘기 체험장이 있습니다만...

▲ 역시 인생은 타이밍

포스팅이 전반적으로 투덜거리는 느낌으로 보였다면 활을 못쏴서 입니다.

쏴보고 싶었는데...

 

이 밖에 사진으로는 못찍었지만 이순신 후손들의 묘소도 현충사 안에 있습니다.(이순신 묘소는 다른 곳에 따로 있다고 합니다.)

 

3월초의 현충사 나들이.

전반적으로 북적이지 않아서 좋기는했는데 역시 시기가 좀 아쉬웠습니다.

활도 못쏘고, 눈도, 꽃도 없고, 덕분에 풍경도 휑하고.

그나마 하늘은 맑고 볕은 따뜻했다는게 다행이었네요. 

▲ 꽃도 피고 그랬으면 더 이뻤을 것을.

하소연 비슷하게 적었습니다만 지금쯤 방문하시면 딱 좋을거에요.

제가 일부러 지금쯤 방문하시면 딱 좋을것같아서 시기를 맞춰(...거짓말입니다.) 소개글을 올리오니 4월이 가기전에 주말에 시간내서 한번쯤 들려보세요.

 

멀리서 일부러 들릴 이유까지는 없지만 인근이라면 천천히 산책하기도 좋고, 무료고, 무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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